여보세요?”

 “…….”

 “끊으신 줄 알았네요. 어제 그래서 지갑에서 십만 원 꺼내 주시기에 택시비하시라고 제가 만원 돌려드렸는데. 집엔 잘 들어가셨나 보네요.”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수리비가 얼마죠? 바로 보내드릴게요.”

 “오늘 수리문의를 해보니 2300만 원 정도 나온 다네요. 계좌번호 보내드릴까요?”

 “?”

  차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반응에 지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제 다 말씀드린 부분인데……. 하긴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으니까. 이해합니다. 그럼 어제 저한테 수리비 대신 6개월 동안 시키는 대로 하신다고 노예계약서 써주신 것도 기억 안 나시겠네요?”

노예계약서요?”

문자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보세요.”

 차연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꼬부랑글씨긴 했지만 그녀의 필체가 분명했다. 6개월 동안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한다고 쓰여 있는 내용도 지우의 말이 맞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확인하셨죠? 우선 당황스러우실 텐데 푹 쉬시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우는 와인을 쭉 들이켜고 창가로 향했다. 63빌딩이 보이는 최고급 펜트하우스에서 바라보는 도심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사실 수리비 2300만 원 정도야 그에겐 전혀 부담 없는 금액이었다.

  술에 취한 여자의 실수고 그냥 봐줄까 싶었지만 먼저 노예계약서를 제안한 것은 차연이었다. 이미 그의 외모를 보고, 혹은 돈을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이야 많았다. 그럼에도 차연의 제안을 받아 준 것은 단순히 재미있어 보였다.

  지우는 잔에 와인을 한잔 더 따르며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전화를 끊은 차연은 멍하게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지금 그에게 벌어진 이런 일들은 그녀를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2. 늑대와 토끼

 

 차연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직도 간간히 팔리는 책들 때문에 들어오는 인세와, 인터넷에 연재중인 소설수익, 그리고 최근에 시작한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작가까지 한 달 수익이 240만 원 정도.

  월세 45만원에 공과금을 내고, 차희 용돈으로 30만원을 주고 나면 넉넉하진 않아도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그런데 통장에 모인 돈은 2천만 원이 안됐다. 그마저도 차희의 작업실 까지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서 아등바등 모아오고 있는 돈이었다.

  지우와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차연은 연신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보증금을 빼고 통장에 있는 돈을 다 합치면 얼추 1500만원, 다음 달에 계약이 끝나는 소설 재계약을 조건으로 선 인세를 받는다면 300~500만원사이, 문제는 다음 달이면 지금 주 수익인 어린이교육프로그램 작가는 끝이 난다.

  얼추 2천만 원을 모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모아서 낸다면 선 인세를 받아서 이사를 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집에서 1시간거리의 작업실로 오고가는 차희를 위해 가려던 이사였으니 못 가게 된다면 동생이 보통 실망을 할 것이 아니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있던 지우가 차연을 반겼다. 꽤나 번화가에 있는 카페인데도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잘됐네. 둘이 자매에요? 손님이 요금을 안주셔가지고…….”

 “죄송해요. 얼마죠?”

 차희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곤 차연을 부축해 집으로 향했다. 

 “언니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차희야 차희야 우리 차희야.”

 끙끙거리며 집에 도착한 차희는 차연을 침대에 눕히곤 이마에 땀을 훔쳐냈다. 여간해선 술을 마시지 않는 언니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니 뭔가 이상했다. 

 “남자친구랑 깨졌나? 아침에 물어보면 되겠지 뭐”

 차희는 차연의 옷을 벗겨주고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준 다음 방을 나섰다. 

 겨우 눈을 뜬 차연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몸이 멍든 것처럼 아팠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말랐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서 거실로 향하는데 아직도 몸이 휘청거렸다. 입은 아직도 술맛으로 가득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정신없이 들이켜는데 차희가 외출을 했다 돌아왔다. 

 “언니 일어났어? 약이랑 언니 좋아하는 순댓국이랑 사왔어.”

 “후……. 나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어?”

 차희는 냄비를 꺼내 순댓국을 끓일 준비를 하며 말했다.

 “기억 하나도 안나? 언니 골목에서 택시기사랑 싸우고 있는 거 내가 데리고 들어왔잖아.”

 “택시기사랑 싸워? 내가? 진짜? 아휴 미친년. 논현동에서 지연이랑 아…….수진인가? 기억이 안 난다.”

 머리를 부여잡고 방으로 향하는 차연을 보며 차희는 피식 웃었다. 다시 침대에 누운 차연은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야 너 또 엄마한테 이르면 안 돼.”

 “언니 하는 거 봐서.”

 차연은 휴대폰 통화목록부터 살폈다. 다행이 어제 미팅했던 출판사 담당자 번호가 마지막이었다. 문자메시지를 하나하나 체크하니 광고만 열통이 넘게 와있었다. 문자를 하나씩 지우는데 어제 만났던 담당자가 남긴 문자가 있었다. 그제야 차연은 어제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났다. 

 ‘이차연씨. 저 박용희입니다. 어제 있었던 일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자 확인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저희 차연씨 글이 꼭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출간했던 소설의 계약기간이 다음 달이면 종료가 되다보니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계약을 하자고 접촉을 종종해왔다. 어제 만났던 담당자도 그 관련 미팅을 진행했던 사람이었다. 

 인세도 계약조건도 괜찮았다. 하지만 미팅도중에 담당자가 성적인 농담을 해왔다. 사실 가볍게 장난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긴 했지만, 작가로써의 자존심을 깨는 행위라고 느꼈다. 두 번째 작품 이후로 딱히 흥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담당자의 농담이 더 자극적이었다.

 ‘요즘 여자작가들 출판하려고 편집장들이랑 잠자리 많이 한다던데 차연씨는 그런 거 없으시죠? 농담입니다. 농담.’

 “언니야 순댓국 다 끓었어. 얼른 밥 먹고 약 먹어. 나는 작업실 나가봐야해.”

 멍하니 어제 일들을 생각하고 있던 차연은 차희의 부름에 머리를 흔들었다.

 “응. 알았어. 고마워.”

 차희는 상을 차려놓고 외출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개인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이었다. 

 “나 오늘 조금 늦을 거야. 다음 주에 갤러리편집장님 뵙기로 해서 준비할게 많아. 전화할게.”

 “응 다녀와.”

 차연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순댓국 국물을 떠먹었다. 이미 차희가 새우젓이고 양념장이고 그녀의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순댓국을 먹고 약을 챙겨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딱히 급한 일도 없었고 아직 술도 들깨서 잠이나 더 잘 요량이었다. 

 막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제 사고 친 담당잔가 싶어서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들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차연입니다.”

 “술 좀 깼어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남자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남자는 그녀를 아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예? 누구세요?”

 “아하 기억 못하시는구나. 저 송지우입니다. 어제 논현동에서 제 차에 구토하시고 핸드백으로 긁으셨는데.”

 “.......”

 지우의 말에 차연은 순간 멍해졌다. 뭔가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듯했다.


1. 노예계약서


 “아…… 맛있겠다.”

 휘훈은 중국집 앞에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달달한 자장면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제 아침에 집에 남은 마지막 라면을 끓여먹고 여태 공복인 그였다. 거기다 돈이 없어서 집까지 걸어가고 있는 길이었다. 

 차희가 공연을 보러왔다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었을 텐데 무슨 일인지 공연장에 오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핸드폰요금도 미납이라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집으로 가며 음식점이 나올 때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문을 다 당하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집근처에 있는 교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를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복에 걸었더니 식은땀이 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데 밖에 있는 테이블에 누군가 먹다 남은 컵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다툼을 벌였다. 

 “자…….잠깐 쉬었다 갈까? 다리가 아프네.”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통통하게 불어터진 면이 빨간 국물과 어울려 그를 유혹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컵라면 용기로 다가가고 있었다. 

 “휘훈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차희였다. 아무래도 예쁜 그녀가 마치 천사처럼 보이는 그였다. 

 “왜 이제와. 집에서 기다리다가 안 오기에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오늘 갑자가 일이 생겨서 공연 못 보러갔어. 미안해. 밥 안 먹었지? 맛있는 거 먹으러가자.”

 차희는 휘훈의 손을 붙잡고 이끌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문을 열은 식당이 많지 않았다. 결국 24시간 분식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차희는 맛있는 것 사줘야 하는데 분식집이 뭐냐고 투덜거렸다, 

 차희는 허겁지겁 라면과 김밥을 먹는 휘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저녁을 먹은 후였다. 그녀가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휘훈은 순식간에 라면을 비워냈다. 

 “후아…….응? 아직 다 안 먹었어?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어? 그래 다녀와.”

 휘훈이 화장실을 간 동안 차희는 그의 기타가방에 이만 원을 꼬깃꼬깃 접어 넣었다. 그녀도 용돈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휘훈보단 넉넉했다. 그녀가 친구들과 커피한잔 마시며 수다를 떨 돈이면 그는 밥을 한 끼 굶지 않을 수 있었다. 

 보통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집에 바래다주는 것과 달리 차희는 휘훈을 집에 바래다주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남들은 도대체 왜 만나냐고 하지만, 그녀에겐 가장 힘이 들 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어딘가 쓸쓸했다. 차희는 창밖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사이 차연은 술에 취해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만 원짜리를 주어서 건네며 꼬부랑 발음으로 말했다. 

 “아이쒸 택시비가 뭐가 그렇게 비싸요. 만원이면 되잖아요.”

 택시기사는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손님. 아휴 술 냄새……. 요금이 만 칠천 원 나왔습니다. 달랑 만원만 주시면 어떻게 해요.”

 “아 몰라몰라 만원밖에 없다니까요.”

 “손님. 자꾸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던 차희는 차연을 발견하곤 반갑게 부르며 달려갔다. 

 “언니!”

 비틀거리는 차연을 차에 기대게 해놓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택시기사는 차희를 발견하곤 담배를 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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